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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조선업 흑자전환, 몇년치 일거리 수주 물량 확보

한국 조선업 흑자전환, 몇 년 치 일거리 수주 물량 확보

한국 조선업 흑자전환, 몇년치 일거리 수주 물량 확보
한국 조선업 흑자전환, 몇년치 일거리 수주 물량 확보

최근 수년간 적자를 면치 못했던 국내 조선업 3사인 한화오션, 한국조선해양, HD현대중공업이 8년 만에 흑자전환을 앞두고 있다. 선박 수주 물량이 2년 치 넘게 확보, 대우조선해양도 한화그룹이 인수가 확정되어 재무구조 개선, 원달러 환율이 1,200 ~ 1,300원대 유지되면 큰 문제가 없을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업은 어떻게 발전해 왔으며 세계 1등이 될 수 있었을까?

1. 한국의 조선업 발전

우리나라의 배는 삼국사기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392년 일본 야마타이국에 사신을 파견할 때 배 100척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에는 삼국통일 후 한반도 전역을 통치하는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주변국과의 교역도 활발해졌고 이에 따라 크고 빠른 선박이 필요했다. 풍부한 산림자원을 바탕으로 선박건조에 필요한 목재 조달이 용이하였고 철강 또한 발달한 것을 바탕으로 고려의 선박 건조 기술은 매우 뛰어났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조수 간만의 차가 큰 우리나라 바다를 떠다니기에 적합했던 한선( 뗏목형태)이라는 배가 주로 이용되었다. (16세기 중반 ~19세기 후반) 최대 500명을 태울 수 있어 조선시대 주요 교통수단으로 이용되었고 무역 등에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군의 침략을 막기 우해 거북선이 건조되었다. 거북선은 배 위에 갑옷을 씌우고, 거북선 목 장갑부는 배의 앞부분을 보호하기 위해 견고한 나무판자를 겹겹이 쌓아서 만들고 목 장갑부 위에는 금속판이나 철사로 강화해서 외부 충격등에 저항할 수 있었다. 목 장갑부 배 전면에 대포가 배치하여 전진하며 화력을 뿜었고 측면 대포도 다방면에서 화력을 뽐냈다. 일제 침략으로 우리나라 조선업 기반이 파괴되고 일제로부터 불법점거 당하고 통제되었다.

2. 박정희와 정주영

우리나라가 수출로 먹고살기 위해서는 선박이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까지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정책 아래 높은 성장을 이루었고 이때 정주영 회장은 한국 조선업의 발전을 위해 박정희 대통령과 긴밀한 협력을 한다. 박정희 대통령은 1967년 5월 조선공업 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조선업 육성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정주영 회장은 1967년 현대중공업 설립 후 한국 조선업 발전을 위해 앞장서며 1973년 세계 최초 12만 톤급 유조선을 건조하게 된다.

3. 윤보선

정주영 회장은 현대중공업 경쟁력 강화를 위해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과 전문가를 찾고 있었다. 윤보선은 당시 독일에서 선박건조 분야의 탁월한 경력과 기술을 쌓은 한국계 기술자로 알려져 있었다. 정주영 회장은 윤보선에게 현대중공업으로 합류해 선박 건조 기술을 전수하고 발전시키는 역할을 제안하고, 윤보선은 한국 조선업의 발전을 위해 그 제안을 수락하게 된다. 정주영 회장과 윤보선의 만남은 한국 조선업 역사에 큰 의미를 갖는데 이는 한국 선박 건조 산업을 세계적 수준으로 끌어 올린 중요한 기반 중 하나가 되었다.

4. 대한민국 조선업 다시 우뚝

우리나라 조선업은 세계 최고 품지을 자랑한다. 국제해사기구의 선박 안전규정을 준수하고 선박 품질 인증하는 선급협회로부터 우수한 평가를 받고 있다. 2018년 일본조선소에서 만든 배(에버기븐호)가 2021. 3. 23. 수에즈 운하에서 좌초된 적이 있다. 중국 건조 LNG선이 해상에서 운항중 멈춘 사례는 뉴스검색으로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코로나 이후 회복되면서 고부가치 선박, 친환경 선박에 대한 수요가 증가했다. 조선업계 기술력은 최고 수준에 더 향상되었다. 고부가가치 선박 기술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고 친환경 선박 개발에도 적극적 투자하고 있다.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조선업 부활에 기여한 부분이 있다. 이런 요인들로 지난해 세계 발주량의 37%를 수주하며 2018년 이후 최대 수주 점유율을 기록했다.